달리기를 말할 때 아빠가 하고 싶은 이야기

책에 대한 이야기
나는 어린 시절부터
거의 모든 것을 독학으로 배워야 했다
학원 한 번 다닌 적이 없었고
조언을 해주는 선배나 스승도 거의 없었다
내게 뭔가를 가르쳐준 것은
책이 유일했을 뿐이다
나는 거의 모든 것을 책으로 배웠다
스포츠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핑, 수영, 자전거, 클라이밍, 배드민턴, 테니스, 달리기 주법까지
유튜브의 영상보다
책이 좋았던 것은
책 속에는 뭔가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책 속에는 뭔가가 깃들어 있어서
숭고한 정신세계를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다
책 속에서는 달리는 기술이 아닌
달려온 자의 숭고한 정신세계에 대해서 씌여있었다
나는 달리기가 아닌
달리는 자의 숭고한 정신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책을 선물 받다

택배로 도착한 책의 모습
함께 생에 첫 마라톤을 함께 준비하던 준호형님이
수류탄을 보내주겠다며 주소를 물어봤다
훈련소에서 두 손으로 꾹 움켜쥔 채
멀리 강가를 향해 던지던 수류탄이 떠올랐다
엄청난 굉음
그 정도의 폭발력이라면
요긴하게 쓰일 것 같았다
(모형 수류탄이라도 그리운 마음에)
놀랄만한 것을 주겠거니 하며
집주소를 알려줬다
책을 선물한 적은 많았지만
책을 선물 받은 적은 극히 드물었다
책은 내게 수류탄처럼
나 자신의 영혼을 뒤흔드는 폭발력을 지녔기에
내가 선물 받은 책은
그 어떤 수류탄보다 더 강력하게 울려 퍼졌다
어린 시절 내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하루키의 소설 속 거리를 거닐며
하루키의 원서를 모으고
원서를 꼼꼼히 읽으며
하루키의 사상과 교감하는 것은
아주 즐거운 취미생활이었다
내 유학시절에 이 책은 출간 전이었고
당시에 하루키는 철저히 베일에 감춰진 인물이었다
그 흔한 사진 한 장 공개된 것이 없었다
그래서 하루키에 대해서 만큼은 궁금증이 많았다
조금 더 이 책을 빨리 알았더라면
달리기에 더 빨리 빠져들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런 일은 없었겠지만)
이 책은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개인적이고 사적인 하루키의
유일한 회고록이며
달리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만약 내 묘비명 같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리고 그 문구를 내가 선택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렇게 써넣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그리고 러너),
1949~20**,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작가와 러너를 동급으로 새겨놓고
기억되기를 원했던 이유는
커피숍에서 커피 잔을 들며
감상에 젖어 글을 쓰는 작가 아닌
처절한 몸부림으로
끝까지 걷지 않고 달렸던
러너로 남고 싶었던 바램 때문일 것이다
유일한 회고록을
달리기 이야기로 가득 채우게 만들 만큼
달리기는 충분히 매력적인 운동이다

퇴근 후,
집에 도착했을 때
한 권의 책이 도착해 있었다
서둘러 아이들을 재우고
나 역시 10시 취침했다
알람도 없이 새벽 4시에 기상했다
일부러 새벽에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꿈속에서
책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하루키의 목소리였던 것 같다
하루키는 감수성 풍부한 미소년처럼 느껴졌고
근육질에 러너 하루키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열흘 전 마라톤 풀코스를 마치고
이제 대회와 상관없이 하루 10k를 매일 달리는
이제 막 러너가 되어가는 나에게
러너 하루키와의 만남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새벽 4시부터
한 줄, 한 줄 떨리는 마음으로
마라톤을 달리는 심정으로
한순간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하루키와의 설레는 만남
하루키가 들려주는 이야기
나의 심장은 요동치고 있었다
달리기를 말할 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항상 궁금했던 질문들
그 해답이 이 책 속에 있었다
소설가 하루키가 아닌
러너 하루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달리기를 말할 때 아빠가 하고 싶은 이야기
3km도 달려본 적 없던 나는
서른 살의 나이에 이등병이 되어서
강압적으로 달려야만 했다
군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새벽 6시 강제 기상에
강압적으로 달리는 것은 무척 괴로운 일이다
(그것이 강해지는 일일지라도)
당연히 재대 이후에 달리기는 중단되었고
그 이후로도 달려야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한
서른셋의 청년에게 달리기란
가혹한 고통의 한계치였고
나 자신에 대한 학대였다
훈련량도 부족했고
즐겁지도 않았다
그저,
나 스스로의 한계를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한 마라톤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하루키의 그것처럼,

하루키가 갑자기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도
하루키가 갑자기 달리기 시작 한 것도
그 누군가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다
(시켜서 될 수 있는 일도 아니지만)
어쩌면 소설가 특유의 모험심 때문에
스스로의 한계를 알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서른셋의 나이에
스스로의 한계가 궁금했던 나처럼
서른셋의 하루키는
그렇게 달리기를 시작했다

건강한 두 딸의 아빠가 되기 위해서
가족을 지키는 아빠가 되기 위해서
나는 이를 악물고 달리고 있다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소중한 것들을 지켜내기 위해
사랑하는 것들을 지켜내기 위해
나는 계속 달릴 것이다
그리고 다음 목표는
울트라마라톤이다

"나는 나라는 존재가
자연의 거대한 모자이크 속의 미세한
하나의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 하루키의 글 속에서
먼저 달려간
하루키의 길 위에서
내가 이어서 달려간다
활자들이 사라지고
하얀 안갯속,
여백의 길이 열린다
거친 표면이 사라지고
하얀 공백 속,
새로운 길이 열린다
나는 달린다
달리면서 나 스스로는 사라지고
달리는 행위 자체만 남는다
달려본 사람만이 아는 그것,
그것이 삶을 달콤하게 만든다
하루키를 통해
달리기의 달콤한 그것을 맛본다
달리는 것의 매력을 느끼게 해준 준호형님에게
달리는 매력이 배가 되도록 책을 선물해준 준호형님에게
이 글을 받칩니다
형님과 함께 달릴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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